교사대학

제     7     강


신구약중간사


강  사 :  이   종   인   장  로

http://www.jinyhome.net


2004년도


영주교회  교육위원회

http://www.koreachurch.or.kr

 



신구약중간사(新舊約中間史) 


1. 신구약중간사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역사를 말하는가?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되기까지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기라 할 때, 그 시기의 이스라엘 역사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구약시대로 보고 어디서부터 신약시대가 시작되는가 하는 데에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유대인들이 마지막 선지자라 생각하는 말라기 시대 이후(기원전 430년)부터 예수 그리스도 탄생까지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구약성서(가톨릭정경)의 마지막 부분인 마카비 하권이 완성된 이후(기원전 160년 이후)로부터 사도 시대까지를 신구약 중간기라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 중 많은 책들은 바벨론 유배 시절 이후(기원전 538년)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 재편집되거나 새로 씌어졌고, 12소선지 중 다수 선지자들의 활동도 계속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형성된,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역본인 70인역(Septuagint)까지 생각한다면 신구약중간사는 모호해지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본 강좌에서는 신약성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유대교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유대교(Judaism)의 탄생시기를 찾아서 바벨론 유배 이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 유대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있어온 종교가 아닌가요?


  물론 넓은 의미에서 유대교라고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천여 년에 걸친 유대민족의 종교현상 전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보면 유대교는 바벨론 유배 이후에 비로소 뿌리를 내려서 오늘에 이른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유대교라는 종교 사조가 부상하면서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일단락 되었고 ‘유대교’의 역사로 새롭게 탈바꿈하여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유대교와 유대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성경을 읽다 보면 누구든지 유대인이라는 단어나 개념이 구약성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신약성경에서는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바벨론 유배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내외적으로 새로운 요인이 들어와 '유대인' 즉, 유대 지파 출신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새로운 요인이란 무엇입니까?


  다윗 왕국의 몰락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민족의 구심점이 없어져버린 것이었지요.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들의 침입과 지배가 이어졌고, 그들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유대인들의 투쟁과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과 종교에 대한 동질성과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새로운 요인이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파생된 복합적인 것들이지요.


4. 유대를 지배한 강대국들로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나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이라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어서 유대 왕국이 바벨론 제국에게 패망하여 바벨론으로 유배 갔었다는 것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페르샤 제국이 바벨론을 멸망시켜 유대인들은 고레스 황제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레스는 이듬해 칙령을 내려 바벨론에 유배 와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귀향하여 파괴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처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배척 보다는 유대인의 민족성을 보존하고 장려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유대지파, 즉 유대인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하게 됩니다. (학자들은 관습적으로 에스라 때까지는 이스라엘인과 유대인으로 말하고 그 이후 부터는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5. 귀환 이후에는 유대인들을 통솔하는 지도자가 따로 있었습니까?


  당시 단체로는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이란 유배시기 이후에 생긴 유대인의 최고회의인데 대제사장을 포함한 71명의 장로들로 구성되었지요. 이것은 정부 의회의 기능을 지니면서 동시에 고등법원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산헤드린의 결정은 법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모든 종교적인 문제들과 율법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루었고, 대제사장의 권한을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페르샤 제국은 유대인을 팔레스티나 지역의 책임자인 총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었지요.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스룹바벨은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여 (기원전 515년 3월)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였고, 느헤미야는 율법준수와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를 명하여 순수혈통과 전통계보를 유지하도록 강조하였습니다.

  이어 율법학사 에스라가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세의 법전을 가지고 와서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고, 그 역시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엄하게 다스려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어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든 이는 바로 ‘에스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그러면 이미 한 결혼을 파기할 만큼 순수혈통이 중요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민(選民)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기에 이방인들과는 엄연히 구분된 특별한 민족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상은 바로 종교적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유대인들의 절대 절명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패망 이후 이방민족과의 혼합으로 유명무실해져 버린 북왕국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굳이 분리를 고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정결한 백성, 이방인들은 죄인이라는 인식은 신약성경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마 5,46‐47; 5,7; 18,17; 행 2,23). 우리는 역사 속에서 유대인과 다른 민족들 간에 생긴 깊은 적대 의식을 찾아 볼 수 있고,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모습들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악순환은 에스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7.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은 순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나요?


  이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출신들로서 바벨론 유배 기간 동안 유대 인접지역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의 혼혈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은 혼혈 그 자체라기보다 혼혈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종교의 혼탁성 때문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과 자신들이 이스라엘 후손임을 주장하는 사마리아 사람들 간에는 심각한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지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철저히 배척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성전 복구를 방해했습니다.

  이때부터 골 깊은 대립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노예보다도 한 단계 낮춰 취급할 정도이며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 지독한 욕으로 통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민족적인 증오심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이웃사랑의 계명은 이런 배경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8. 페르샤 제국 다음으로 누가 팔레스티나를 지배했나요?


  그 다음에 팔레스티나를 점령한(기원전 332년) 이는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입니다. 이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페르샤 지배하에서 누렸던 종교적인 자유를 그대로 누릴 수 있었지만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도입된 헬레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됩니다.

  사실 그는 동부 지중해변에서부터 인도까지 자신이 정복하는 곳마다 그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후 알렉산더 대왕이 열병으로 사망하자 그 유언에 의해 영토는 막료(幕僚)장군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티나에는 프톨레미 왕조가 서게 되었고(기원전 323년), 시리아에는 셀류커스 왕조가 서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대우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은 지속되었습니다. 그후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게 된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 지배하에서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호의적인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9. 드이어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얘긴 가요?


  안티오쿠스 3세가 로마와 전쟁을 벌여 참담하게 패하면서 그 호의적인 상황은 달라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미화 3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전쟁 배상금 5천 달란트를 로마 측에 지불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채우기 위해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제로 탈취했습니다. 왕위를 이은 셀류커스 4세, 안티오쿠스 4세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지요.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것입니다.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하고 인두세, 성전세와 같은 유대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마을 전체를 노예로 팔아 넘기기도 하고,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 혼합주의를 전 유대에 확산시키기 위하여 칙령을 발표하여 시리아의 법과 관습을 추종하게 하고, 그리스 신과 여신들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0. 그 당시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어떠하였나요?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지도층인 유대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소홀히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식 경기장에서 세속적인 쾌락에 탐닉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성전 뜰은 술꾼들의 숙소가 되었고 성전에서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불경스러운 이방 의식들이 자행 되었습니다(마카비 상 1:44‐50 참조).

  또한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의 동생인 요수아라는 인물은 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리스식 이름인 야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대제사장직을 얻어내는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지불하여 대제사장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치자의 헬레니즘화 정책 추진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겠다는 메넬라우스라는 자가 나타나 야손은 불과 3년만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행위까지도 거침없이 자행되었습니다.

  셀류커스의 역대 왕들은, 이러한 대제사장들의 묵인 하에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성전의 재산들을 약탈해갔습니다. 심지어 성전 전면에 붙여진 금박까지도 벗겨가기도 하였습니다.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는 통치자들은 팔레스티나 곳곳에 그리스식 경기장, 신전, 대중목욕탕을 세웠고,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금하고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한 떼의 돼지를 성전에 몰아넣고, 제우스신에게 헌납된 제단 위에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지요.


11. 유대인들은 그런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었나요?


  유대인들의 반응이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부류는 헬레니즘화를 선호(選好)하고 받아들인 이들로서 왕의 칙령에 흔쾌히 호응하여 동참하였고, 또 한 부류는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을 버리고 할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갔고, 나머지 한 부류의 사람들은 추종을 강하게 거부하고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이들이지요. 마카비서는 이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에 꺾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마카비 상 1:62‐63).

  이렇게 저항하는 이들에게 취해진 것은 전대미문의 박해였지요. 아기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사형 당했고, 부정한 음식에 손대기를 거절한 많은 이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그 외 여러 이유로 잔인한 고문을 당하여 죽어간 이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구약성경 중에 유일하게 묵시문학으로 분류되는 다니엘서는 바로 이렇게 안티오쿠스 박해가 한창일 때 엮어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신앙공동체의 결속과 반발이 더 심해진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지요. 드디어 일부 유대인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때에 하시딤(Hasidim)파에 속한 사람들이 무장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12. 그러면 하시딤파가 무장봉기를 일으켰나요?


  하시딤파가 무장봉기를 처음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무장봉기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의 저술과 마카비 상하권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맨 처음 하스몬 일가인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 마따디아에 의해 촉발되었고 후에 하시딤파 사람들과 합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우선 하시딤파에 대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하시딤'이라는 말은 '경건한 자들' '율법에 충실한 자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종파는 여러 단체들의 필요에 따라서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필요란 바로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는 세력에 대항하여 타협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종교금지와 박해에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였거나 그런 조치로 위협을 받았던 자들로 이루어진 숙명적인 결합체였습니다.

  종말론적인 사상을 물려받았던 이들도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고, 엄격하게 율법에 충실 하려는 자들도 이 종파에 소속되어 있었지요. 이와 같이 하시딤파 사람들은 호전적인 정치 집단이 아니라 종교를 우선으로 여기는 경건주의자들이지요.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바리새파 에쎄네파라는 종파는 바로 하시딤에서 나왔답니다.


13. 하스몬 일가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민중봉기를 일으켰나요?


  앞에서 민중봉기를 촉발한 이가 하스몬 일가의 마따디아라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 할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제사장 마따디아가 살고 있는 모데인이라는 마을에 악명 높은 칙령이 내려지면서 시작됩니다. 이 칙령을 선포하기 위해 마을에 도착한 관리는, 장로인 마따디아가 이방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데 앞장서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이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고, 이를 따르려는 한 유대인을 죽이고 그 관리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다섯과 그를 따르는 열성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어느 구릉지대로 피신을 했고 그곳에서 하시딤파 사람들을 만나 그들 모두는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들의 규모가 매우 작았으나 점점 그 수효가 늘었습니다. 마카비 상권에서는 그들의 활동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죄인들과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고 그들을 쳐부수었다. 이때 살아남은 적군들은 이방인들에게 도망쳐 가 피난처를 얻었다. 마따디아와 그의 동지들은 이교제단을 찾아 다니면서 모두 헐어버리고 또 이스라엘 땅에 사는 어린이로서 할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고 교만한 자들을 쫓아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다 잘되어갔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왕의 손에서 율법을 구해내었고 죄인들에게 승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마카비 상2:44‐48)라고 말합니다.


14. 그러면 마따디아 편이 이겼나요?


  아직은 초반전에 불과합니다. 사태의 추이를 더 지켜보기로 하지요. 그들은 율법에 대한 열성만큼이나 열심히 싸웠고, 안식일에 적이 공격해올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대응하여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봉기를 주도한 마따디아는 봉기 2‐3개월만에 심한 과로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잘, 요나단이라는 다섯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임종 전에 셋째 아들인 유다에게 자신의 영도권을 물려주었지요.

  유다는 마카비(쇠망치라는 뜻)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무모하리만치 용감하였고, 영도력이 뛰어나 그 동안 산발적이었던 모든 게릴라 부대를 자신의 지휘 하에 일원화 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이 유대인의 무장봉기를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전환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의 이름을 그의 별명을 따라 '마카비 항쟁'이라 부릅니다. 유다가 이끄는 이 게릴라 부대는 셀류커스 군대를 철저히 격파시켰고 다시 새로운 제단을 세워 성전이 모독된 달로부터 꼭 3년이 되는 기원전 164년 12월에 성전을 다시 봉헌하였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이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하누카'(봉헌이라는 뜻)축제를 지내게 되었지요.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자신을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신 것이 수전절(修殿節) 때였다(요10:22‐38 참조)


15.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완전히 독립한 건가요?


  종교적으로는 자유를 얻었다 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유다(마카비)가 죽고 난 후 동생인 요나단이, 다시 그 형 시몬이 뒤를 이었으나 여전히 셀류커스 왕조의 간섭을 받는 상태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은 계속되었지요.

  또한 그들과 평화협상을 맺기도 했고, 셀류커스 왕은 하스몬 일가가 예루살렘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시몬이 셀류커스 군대를 대파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 승전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고 할 수 있지요. 거의 30년 동안이나 걸린 기나긴 과정이었습니다. 그 동안 하스몬 일가는 유대인들의 실질적 통치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요나단은 독립군 총독 직에 만족하지 않고, 다윗 시대 이후 대대로 사독 가문이 맡아 해온 대제사장직까지 겸직하는 과욕을 부렸지요. 물론 셀류커스 왕조 쪽에서 수락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의 뒤를 이은 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민중봉기 처음의 정신과는 달리 셀류커스 왕조를 섬기며, 유대인들에게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려고 고심하는 전략가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마카비 전쟁이 유대인들에게는 독립이 아닌 하스몬 일가의 통치시대만을 등장시켰을 뿐이지요.


16. 유대인들의 반발은? 처음 민중봉기에 합세했던 하시딤파는 어떻게 되었나요?


  요나단과 시몬이 대제사장직까지 독식하고 정치적인 방향으로만 흐르자, 하시딤파 사람들은 점차 그들이 하는 일에서 관심을 잃고 손을 떼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모였던 하시딤파 사람들은 모이기 전에 그들이 지녔던 고유한 특성을 따라 분리되었습니다. 여기서 생겨난 종파가 바리새파와 에쎄네파이지요. 이때 이미 사두개파가 있었으니 유대교 내에서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진 세 개의 종파가 존재하게 된 셈이지요. 이들 세 종파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결국은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오직 율법의 권위 하에서 살아 갈 것을 다짐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데 있어서는 각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7. 세 종파의 견해는 각각 어떤 것이었나요?


  우선 사두개파에 대해 알아보죠. 사두개파 사람들은 기존의 귀족들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는 고위 제사장들 그리고 부유한 재산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실리적인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현재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류의 통치자건 상관없이 타협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숭상하고 하스몬 왕가 및 후에 등장하는 로마 정권과도 결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교란 상태나 변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득권층이 바라는 바와 다를 바 없었지요. 후에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한 것도 바로 변혁을 두려워했던 이유에서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상당히 보수적이었습니다.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된 율법의 계율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죠.

  또한 부활, 천사, 사후의 상벌문제,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합법적인 성전 제사를 엄숙하게 드리는 것 그리고 의식과 제물봉헌에 관한 규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지요. 이런 이유로 해서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기에 사두개파와 적대관계가 되었나요?


  바리새파 사람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철저히 배격하였다는 점에서 사두개파와 구분됩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 어떤 종파보다도 지나치리만큼 엄격했지요. 그러나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모세의 율법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구전된 율법을 그대로 전승하며 발전시켜나갔습니다. 후에 이것은 미쉬나로 편찬되었고, 결국에는 탈무드로 집대성되었습니다.

  잠깐 미쉬나와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하면, 기원전 3백 년부터 서기 5백 년까지 유대교 랍비들에 의해 구두로 전해진 구전율법을 탈무드라고 하는데 중심 본문은 미쉬나, 이 본문의 몇 배 분량의 주석 부분은 게마라라고 합니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종교 및 모든 생활 전반에 관한 가르침인데 성문율법인 구약성경와 함께 바리새파에 의해 주도된 전통 유대교의 경전이라고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부활신앙, 사후의 상벌, 천사와 같이 새로 도입된 개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다른 점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상류층에 속한 이들이라면 바리새파는 주로 평신도들이었지요.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도덕적으로 성실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실제로 유대교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후에 율법의 틀에 매여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순을 나타내어 예수께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19. 율법학자(랍비)들과 바리새파는 동일한 사람들을 가리키는가요?


  둘은 명확히 구분되는 말입니다. 단지 바리새파 지도자들이 율법학자들이었고 많은 율법학자들이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런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요. 당시 사두개파 율법학자와 같은, 바리새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구성원들을 보면, 소수의 율법학자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상층계급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외 대다수는 평민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라고 모두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그들은 비록 율법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할지라도 율법에 헌신적인 사람들로서 바리새파적인 정결례와 십일조 의무를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으며, 이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는 대다수의 민중들을 업신여겼습니다. 그와 같은 율법학자들의 허영심과 명예욕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은 예수께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았지요.


20. 에쎄네파는 어떠했습니까?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들이 전해 내려오지만, 에쎄네파에 대한 기록은 얼마 전까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사해 근처 동굴에서 '쿰란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에쎄네파에 대한 상당 부분들이 밝혀지기 시작했지요.

  앞에서 언급한 하시딤파에 대한 내용과 대제사장직까지 독식한 요나단의 과욕은 에쎄네파의 출현과 관계가 있습니다. 에쎄네파의 지도자는 단지 '의로운 스승'이라는 별명만으로 전해지지만, 대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맡아 드려왔던 사독계열의 대제사장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시딤파 일원으로 민중봉기에 참여했지만 요나단이 사독계열 가문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직을 차지한 것을 인정할 수 없어 극한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반발은 통치자의 가혹한 박해로 이어졌지요. 결국 에쎄네파의 지도자는 박해를 피해 소수의 추종자를 데리고 사해 근처 쿰란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 은둔생활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들을 두고 '쿰란 수도자'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에쎄네파 사람들은 바리새파보다 더 엄격히 율법을 지켰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세상과 분리된 채 극히 제한된 교류만을 유지했습니다. 묵시문학적인 종말론, 율법중심의 근본주의, 선민주의적 배타의식, 이런 점들이 당시 에쎄네파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사상이라 할 수 있지요.


21. 에쎄네파는 신앙적인 면에서도 다른 종파와 달리 특이했겠네요?


  그들은 임박한 종말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곧 종말전쟁이 일어나 미가엘이 조종하는 빛의 아들들과 벨리알이 조종하는 어둠의 아들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게 되고 그 결과는 예정되어 있지 않지만 만일 빛의 아들들이 이긴다면 메시아를 모시고 종말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라는, 이런 상상에 끊임없이 젖어 있었던 것이지요.

  에쎄네파 사람들은 요나단 일파를 사악한 무리로 보고 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사악한 도시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를 떠나 사막 한가운데서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게 된 것이지요. 원래 제사장들이 지켜야 하는 정결례까지 철저하게 지켰던 이들은 율법과 수도원 규범에 충실한 자신들이야말로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공동체' 라고 인식했고, 종말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종말사상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성행했던 묵시문학의 일종이었습니다. 또한 자기종파의 사람들만이 선민(選民)이라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철저하리만치 배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에쎄네파의 신심(信心)은 신약성경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22. 묵시문학은 그 무렵에 등장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말론을 '묵시'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여러 상황에 대한 심리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묵시문학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이렇게 두 권을 들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사야서 24‐27장, 34장, 스가랴서 9‐14장도 묵시문학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에녹의 묵시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문학의 특징은 이원론적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건은 하나님과 사탄, 빛과 어둠이 벌이는 우주적 투쟁이 반영된 것이고, 죄악으로 더러워진 이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 심판이야말로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시는 날 이루어지며, 그날 사탄의 무리들은 벌을 받게 되고 그 분이 친히 선택하신 이들은 구원 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해 나가시며, 역사의 종말인 심판의 날에 엄정한 판결을 내리시고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간직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묵시적인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위급하고 불안한 상황이 재현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23.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쎄네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나요?


  사실 유대인들 모두가 이 세 종파 중 어느 하나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세 종파가 유독 드러나 보였기에 유대인들 전부가 이들 중 한군데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낳게 됩니다.

  세 종파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주로 무지한 시골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으며, 지식인을 자처하는 축으로부터 '암 하렛즈'(땅의 백성이라는 뜻)라 불리며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순수 유대 혈통을 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출생이 불분명한 사생아들, 도둑질을 하다 잡혀 노예가 되었거나 스스로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된 이들 그리고 개종자들이나 해방된 노예들, 그리고 이방인이면서 해방된 노예들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엄격한 위계 사회에서 억압과 불이익을 당했던 이들입니다.

  이들 말고도 팔레스티나 지역이 아닌 외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의 공동체를 두고 '디아스포라'(Diaspora=분산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에 5십만에서 7십만 정도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던 반면,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살던 해외 유대인 수 는 2백만에서 5백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24. 이들은 이민을 자청해서 간 사람들인가요?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계속 정복당하면서 강제로 추방되거나 통치국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 그리고 살길을 찾아 스스로 본토를 떠난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하나 둘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곳에 남아서 살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엘레판틴 지역이 있지요. 이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동화되어 살기보다 자신들만의 율법을 지키며, 민족과 종교의 고유성을 고수하려 하였기에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유배 초기부터 이 해외 유대인들에게는 함께 율법을 읽고 기도를 위한 모임 장소인 회당이 있었는데, 그 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팔레스티나에도 그런 회당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도행전 6장 9절에는 이 회당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옵니다. 회당은 바로 유배시기에 생긴 유대인의 독특한 신앙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 '70인역'(Septuagint)이라는 성경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25. 마따디아, 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으로 이어진 하스몬가의 통치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위에서 하스몬 일가의 시몬이 셀류커스 왕조의 군대를 대파하여, 독립을 쟁취했다는 이야기까지 했었지요. 그 후 시몬이 그의 사위 프톨레미에게 피살되자(기원전 134년), 아들 힐카누스가, 이어서 그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그 자리를 맡게 되면서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다음 왕위는 계속하여 동생, 그 아내, 동생의 큰아들, 둘째 아들로 이어졌고, 대부분 왕위에 앉은 이들은 대제사장까지 겸직하였습니다.

  기원전 64년에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시리아를 속주로 만들고 팔레스티나도 시리아 속주에 포함시켰지요. 이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로마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팔레스티나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면서 하스몬 왕가는 몰락하게 되고 헤롯 가문이 통치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헤롯도 바로 이때에 등장한 인물이고, 세리니 호구조사니 하는 용어들도 이 시대에 등장한 것들이지요.


26. 헤롯 가문은 유대 출신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나요?


  그들은 이두매 출신이었습니다. 이두매인이란 유대 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스몬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 치세 때(기원전 134‐104년) 유대에 합병되면서 거의 유대 백성의 일부로 간주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 유대인이 아닌 '반쪽 유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에서 실세로 등장할 즈음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텔은 로마에 아부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지요. 당시 로마도 내란으로 어수선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안티파텔은 적절한 충성심을 보여 계속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습적인 로마시민권을 받았고, 총독으로 임명되었지요. 안티파텔은 이제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로마의 편에 서서 공개적으로 팔레스티나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켜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 중 파사엘에게 유대 지역의 통치권을, 헤롯에게 갈릴리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지요. 오히려 헤롯의 경우는 누구보다도 악독하게 로마의 정책을 앞장서서 수행해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의 반발은 있었지만 자신의 정적을 가차없이 숙청, 살해하는 헤롯의 폭정 앞에서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해나가기 위해 마사다와 같은 요새 건설과 그리이스 도시들(polis)안에서의 각종 건축공사와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면서 그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분노는 점점 높아져 극에 달할 수밖에요.

  결국 안티파텔은 독살 당했으나 헤롯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어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고, 로마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헤롯 가문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이 헤롯 밖에 없었습니다.


27. 위의 헤롯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헤롯인가요?


  신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헤롯은 바로 이 사람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였던 헤롯(마14,1‐12; 막 6,14‐29; 눅 3,1‐20), 예수를 심문했던 헤롯(눅 23,7‐15)이 바로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이지요.

  헤롯 대왕이 죽으면서(기원전 4년) 그의 세 아들에게 모든 것을 상속해 주었는데, 아켈라오에게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필립에게는 대부분의 북동부 지역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복형제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아켈라오는 십 년도 못되어 로마로부터 파면 당하고, 필립은 서기 34년에 죽었으며, 헤롯 안티파스도 39년에 파직 당하여 모든 영지는 로마 총독 관할로 귀속되었습니다. 서기 41년부터 44년까지 헤롯 가문 출신 헤롯 아그립바 1세(아켈라오의 아들)가 통치한 적도 있었지만 그 외는 로마인들이 팔레스티나를 직접 통치(서기 6‐41년, 44‐66년)했습니다.


28. 로마가 직접 통치하면서 달라진 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로마 제국은 우선 세제 개혁을 목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주민의 수효와 그들의 자산 상태를 정확히 조사함으로써 세금을 확실하게 징수하겠다는 게 통치자의 의도인 동시에, 민족 전체를 얽매어 통치하려는 기초 작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7절에서는 예수의 탄생이 이 호구조사 때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한 시기는 서기 6‐7년경이고 예수는 헤롯 대왕의 치세 때(기원전 37‐4년)에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호구조사와 예수의 탄생은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호구조사는 유대인들을 분노케 했고 호구조사에 따른 세금 정책과 징수를 맡은 세리들도 유대인들에게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지요.


29. 유대인들의 분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나요?


  이것은 마카비 항쟁에서 유대인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에 불을 질렀습니다. 열심당원(Zealots)의 출현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출발은 이렇습니다. 호구조사에 의해 12세(또는 14세)부터 65세까지의 주민은 관할지역에 한 데나리온을 바쳐야 한다는 인두세 정책이 발표되자 갈릴리 사람 유다가 반기를 들고 나서서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을 조직했고, 공개적으로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열심당원들은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과도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다져진 이들 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단도나 칼을 차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 시몬 (눅6:15) 도 열심당원 이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30. 그러면 열심당원의 사상은 마카비 일가의 사상과 비슷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앞으로 하나님 통치 외에는 그 어떤 세상의 통치도 없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을 마지막 날 이 세상을 심판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는 하나님의 진노와 채찍만이 있는 마지막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열심당원들은 어느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었고 특히 로마에게는 맹세코 저항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통치자들과 타협할 수도 있다고 인식한 마카비 일가의 봉기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당원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결연히 자결을 할 수도 있었지요. 이들이 지닌 사상은 지극히 종말론적이고 묵시문학적이었습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유대 전쟁에서도 열심당원들이 주축이 되었답니다.

31.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이어진 전쟁 말이군요.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나요?


  서기 66년에 플로루스 총독이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착취하고 이에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하자 그 동안 쌓였던 유대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이젠 타협도 불가능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의 궁궐, 로마 총독이 거주하는 안토니아 요새는 모두 불에 탔고, 로마의 보병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유대인들에 의해 학살당하였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마사다 요새와 헤로디온 요새를 점령하였고, 후에 역사가로서 저서를 남겨 우리에게 그 시대의 사건들을 전해준 요세푸스도 당시 열심당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는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이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군에 의해 대부분 쉽게 함락되었지만 예루살렘은 그리 만만치 않았지요.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합류하지 않고 베레아와 펠라로 피신한 상태였고,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서편 지중해 연안에 있는 얌니아로 피했으며 그곳에서 집회를 열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서기 70년 6월, 안토니아 요새의 함락, 같은 해 9월에 예루살렘 성전도 함락되어 성전은 불타버렸습니다. 사해(死海)서안에 위치한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열심당원들이 서기 73(4)년까지 치열하게 항거하다 끝내 모두 자결함으로써 이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32. 그러면 이제 유대교 아니 이스라엘 역사는 끝났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대 전쟁으로 열심당원, 사두개파, 에쎄네파는 모두 소멸되고 바리새파만이 남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현상 유지만을 고집했던 사두개파도, 호전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종말론적인 호기도 모두 꿈에 불과한 것임을 자각하게 되었지요. 이제 유대교는 종말론적인 사상에 매어 마냥 누군가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한길 바로 바리새파가 강조한 율법 중심의 공동체만이 자신들이 가야 할 길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의 입장에서 구약은 바로 탈무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점이지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막을 내렸고, 구약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였음이 증명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한 분이신 같은 하나님을 숭배하고 동일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또한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각하며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말입니다.


33. 신약의 배경이 되는 초기 유대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구약과 신약성경의 무대는 지중해 연안의 근동 지역이라는 같은 장소이지만 사회적, 종교적 배경은 서로 다릅니다.

  귀환 이후 유대교가 제 꼴을 갖추면서 신약의 분위기는 구약에 비해 사뭇 달라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는 신약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이 시기 동안 중동은 세 차례나 판도가 바뀌었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산헤드린의 장로들을 만나고, 여러 종파들을 만나고, 세리를 만나고, 예수께서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읽거나 기도하시는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시절에 팔레스티나는 유대와 사마리아, 갈릴리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전혀 구약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것이기에 놀람과 의문으로 신약을 읽게 됩니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하는 시기입니다. 


34. 메시야 대망사상(待望思想)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들이 구약과 유대인 문헌(기원전200‐100년)에서 종종 언급되어있지요. 유대인들은 선민의식 속에서 시내산 언약과 다윗과 그 후손과의 언약을 믿고 그들을 통치할 지혜롭고 의로운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그들을 다스려줄 날을 학수고대했지요. 그러나 수세기 동안 이방 통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백성을 영광의 시대로 인도하실 것을 고대하게 되었고, 어떤 이는 이방을 물리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용사 다윗’(솔로몬의 시편‐위경)을 갈망하기도 했어요.

  결국 메시야가 오실 때 예루살렘은 화평을 누리게 되어, 언약 가운데 있는 자(유대인)는 메시야 시대에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지만 언약 밖에 있는 자(이방인)는 멸망하거나 유대인을 최후로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함께 메시야 왕국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었어요.


35. 맺는 말


  유대는 바벨론으로부터 페르샤 헬라제국 프톨레미왕조 셀류커스왕조 와 헤롯가의 억압 속에서 메시야 대망사상을 키워 왔으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성장을 지속해 왔어요.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세상의 많은 문화와 세상 풍조가 믿는 자들을 억압할 때 우리는 경건한 자들로서 마카비와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요?


- 끝 -